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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

라프카디오 헌, 19세기 일본 속으로 들어가다

 

출판 : 한울

역 : 노재명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국가의 국민으로 아이러니하지만, 19세기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 시절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책을 찾다 고르게 된 책이 이 책이다.

저자인 라프카디오 헌은 영국 출신의 일본 귀화 작가로, 일본명은 고이즈미 야쿠모이다.

동양인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그 시절, 기득권자 백인이 일본인으로 귀화라니!

현재 기준으로도 파격적인 행동을 19세기에 했으니 얼마나 큰 화젯거리였겠는가.

작가의 삶은 일본에 오기 전과 일본에 온 후로 나뉜다.

일본 이전의 삶은 가시밭길이라면 일본 이후의 삶은 황금빛 수확의 삶이다.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 나라다보니 작가의 일본에 대한 시선은 한없이 긍정적이다.

도입부부터 서양의 알파벳과 일본의 표의 문자를 가지고 비교하는데, 비교 자체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한쪽의 일방적인 폄하로 이어지는게 이 작가의 특징이다.

무엇이 작가를 서구문명의 지독한 비판론자로 만든것일까?

본인은 오리엔탈리즘에 찌든 인물이 절대 아니며, 일본인의 눈으로 일본을 바라봤다고 하지만

곳곳에서 작가의 무지가 드러난다. 

일본 교육 현장을 이상적으로 그리지만 현실은 가혹행위가 가해졌던 현장이고 

일본인은 타인을 능멸하며 자신의 개인적 이득은 취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숱한 침략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찬양 일변도인 작가도 책 후반부에선 일본인의 특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찌른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걸 당연시한다'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을 하나 인용해본다. 

'일본인은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서민들조차 어떤 행태로 위협은 가해도 미소를 지으며 응한다. 그러나 이런 미소는 단순한 미소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보복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몰려온다. 보복은 맹세한 그 순간 그들에게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는게 아니라 드러낼 수 없게 하는 거겠지. 일본 문화 특성상 자기만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바로 이미지메의 대상이 되는 나라니까. 이런 사소함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하나가 되었고 그건 일본을 잘못된 방향으로 빠르게 이끌어갔다. 

이런 잘못된 방향 흐름이 느껴지는 대목이 청일전쟁 입대를 앞둔 제자와 저자의 대화이다. 

이 둘은 죽음을 놓고 약간의 논쟁을 벌이는데, 작가는 죽으면 끝, 생명은 소중하다로 마무리지으려하지만 

제자는 죽음은 일시적일뿐, 궁극적으로 영생을 얻어 가족들을 영원히 지킬 수있다고 반박한다. 

나는 작가의 주장에 동의한다. 주어진 삶은 단 1번뿐이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지 못했는데 죽는다고 영생을 얻고 무슨 수로 가족을 지키겠는가? 그렇게해서 지켜질 가족이라면 차라리 빨리 세상을 뜨는게 맞는거 아닌가? 

라프카디오 헌은 그누구보다 일본인이 되길 소망했다. 안정된 국적을 버리고 일본 귀화까지 택해가며 일본인이 되길 그 누구보다 소망했지만, 그는 끝끝내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작가로서의 유명세와 귀화 백인이란 타이틀이 붙어 도쿄대 교수 직에 앉았지만 파격만큼이나 날아가는건 금방이었다.

더군다나 그 시기쯤의 일본은 라프카디오 한이 아니라 더 큰 계획을 갖고 돌진하던 시절이었다. 

작가가 꿈꾸 온 방향과 1억 일본인이 가는 방향이 다르다는걸 직감하고 뒤늦게 비판의 기치를 들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모든걸 다 접고 일본을 떠나려던 중 지병으로 일본인 고이즈미 야쿠모의 이름으로 눈을 감았다. 

일본인이 되고 싶었지만, 끝끝내 될 수 없었던 저자는 사후 벌어진 일본의 악행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최소한 이 책에서처럼 일본인은 원래 선한 민족이다란 얘기는 못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저자는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일본인이 되길 그토록 원하고 찬양했지만 1센티 이면은 죽는 순간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까.